봉녕사 사찰음식

사찰음식의 역사

사찰음식 역사

경전에 나타난 사찰음식의 역사

사찰음식은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스며든 지혜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초기 경전에는 사찰음식이라기 보다는 음식을 섭생하는 자세와 방법 등을 중심으로 많이 언급하고 있다.

불가에서 식사(食事)를 공양(供養)이라 칭하는 이유는 그 음식을 차리는 데 있어 쓰인
모든 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써, 공(供)의 뜻으로 자양(資養)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 경전에서는 수행자들이 음식을 저장ㆍ조리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탁발(托鉢)하지 않고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곧 물(物)에 대한 집착으로써 무소유를
행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에 수행하는 이들이 늘어나 교단이
형성되고 정사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사원에淨地(정지)를 만들어 묵힌 음식을
만들어 데우거나 익혀 먹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음식이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때에 맞춰 먹을 수 있는 음식에 관해 자세히 제한하고
불비시식계(不非時食戒)를 정하는 등 수행자들만의 음식문화를 전개하였다.

살펴보면,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하되 정오가 지나서는 음식을 결코 먹지 못하게 규정하였으니(時食),
이는 수행자가 수행하는데 있어 최소한의 영양공급을 위한 계율이었고, 때가 아니고서는 먹을 수도 없는
시간상의 철저함이 있었다. 율장에서는 우리가 먹는 음식을 時食(시식), 非時食(비시식), 非時藥(비시약),
七日藥(칠일약), 盡形壽藥(진형수약) 등으로 분류하여 그 쓰임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이것은 음식이 바로 약(藥)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탁발 받은대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아무 음식이나 먹으라는
의미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교화하실 당시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이들은 정성껏 음식을 공양 올렸을 것이고 또 육식을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삼종정육(三宗淨肉)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채식위주의 사찰음식이 형성된 것은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이며
이 시기는 대승불교의 흥기와 맥을 같이 한다.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대승열반경(涅槃經), 능엄경(楞嚴經), 범망경(梵網經) 등의 경전에서
육식과 오신채(五辛菜)를 금하였고, 양나라 무제가 단주육문(斷酒肉文)을
지어 술과 고기를 금한 다음부터 보다 확고한 소식문화(素食文化)가
뿌리를 내렸다.
하루 한 끼, 불비시식(不非時食)을 행하던 스님들이 현재
하루 세 끼의 공양을 하게 된 것은, 당나라 중기 선풍을 일으킨 백장선사
(720~814)께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라는 자급자족의 적극적 생활불교를 실천함에 있어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나, 이 또한 나름대로 율장을 근거로한 법도를 바탕으로
선원의 규율을 명문화 한 것이다. 음식을 대하는 데에 있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경계한 사찰의 음식문화는 나아가 현대 생활의 건강문화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한국사찰음식의 발전과정

사찰음식은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더불어 정착하였다. 육식을
금하는 계율에 의거하여 육류보다는 채소류의 음식이 이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부터 일기 시작한 승려들의 음차생활(飮茶生活)은
신라에 와서는 대중의 생활로 이어졌다. 또 백제와 신라에서는 살생을
국법으로써 금하기까지 하였다.
(훗날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 중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조항을
보면 어느 정도의 육식은 허용했던 것으로 생각 된다 : 세속오계는
재가자를 위한 계율, 국문방위 목적. 육식과 관련은 무근거)
불교의 융성기를 맞은 숭불(崇佛)의 고려시대에는 채소를 재료로 음식의
맛을 내는 법이 다각적으로 연구되어 식물성 기름과 향신료가 발달하였다.
다양한 재료의 떡, 조리법, 가공법이 특히 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현대의 동치미나 나박김치와 같은 침채(沈菜)형 김치류, 절임류 등의
저장음식이 개발되었다.
또한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煙燈會)와 같은 각종 불교행사가 많아짐에
따라 다례(茶禮), 다과(茶菓), 유밀과(油蜜果), 떡 등 의례음식을 크게
숭상하였고, 이와 더불어 헌다의식(獻茶儀式)이 유행했다.
억불의 조선시대에는 차(茶)문화가 쇠하였으나 조선의 식생활문화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차(茶)문화가 쇠퇴하면서 향약(鄕藥)을 섞어
만든 탕(湯), 화채, 식혜, 수정과 등의 음청류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당시 문헌을 보면 대중의 식재료나 조리법 대부분이 사찰의 음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식재료, 약초 등의 사찰 음식물은 일제에 의하여
약재(藥材)로 개발되어 유통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사찰음식의 발전과정
을 돌아보면 한국의 불교사와 흡사한 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불교의 발전이 그러했듯 토속음식과 어울리며 대중화 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하였고, 불교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여 공(供)에 대한 겸손과 탐하지
않은 맛을 가진 건강한 사찰음식문화를 이어왔다.